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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편지 목록
[공지] 하루가는소리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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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 안드로이드 -조연호
2021-09-17
플라스틱 섬유로 만든 작업복을 입고 플라스틱 재료 제조공장 신축현장에서 페트병 생수를 마시며 일을하고 퇴근해서 플라스틱컵 라면과 플라스틱컵 밥을 먹으며 왼쪽 옆 안드로이드 폰으로 플라스틱의 습격이라는 유투브를 본다 중간중간 젓가락질이 멈추지만 다 먹고나면 그냥 대충 구겨서 플라스틱 휴지통에 넣는다 대층 구겨져 생을 마감한 것들이 윤회하듯 돌다가 미세하게 연결된 업이되어 미세하게 스며든다 얼만큼 내 몸이 내 몸이 아닐때 내가 아니게 될까?
066 돈-조연호
2021-09-17
너무 많아서 돈, 너무 없어서 빡 돈. 얼마쯤 있어야 돌지 않을까
065 똥2-조연호
2021-09-17
그 냄새나고 쓸모없는 것을 만들 때에도 많은 과정과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생각하니, 예사가 예사롭지 않다
064 떨어진 꽃잎이 전하는 말-조연호
2021-09-17
아내와 산책하는길 툭 발길에 채이는 목련 바라보지 않다가 쓰레기가 되어버린 소중하지 않은 것이 내 발길에 채이며 말했다. 소중한 것은 그곳에 있을때 바라봐주라고, 바로 지금 주변을 돌아보라고.
063 춤추는 계절-조연호
2021-09-17
이제 갓 피어난 연녹의 작은 잎들 아우성치며 흔들어대는 몸짓 어떤 선율도 없이 바람을 탄다 마스크도 쓰지않고 발 디딜 틈도없이 다닥다닥 붙어서 춤추고 있다 어설픈 몸짓도 춤사위가 되는 계절 봄이 인사하는데, 봄바람이 부는데, 뚝 뚝 떨어진 채 땅만보며 걷고있는 행인들 춤추는 계절을 그리워하며 차츰 잊어가며 걷고있다
062 휴지-조연호
2021-09-17
삶은 휴지다 풍족할땐 펑펑 쓰다가 다 써갈땐 아쉽다 휴지 떨어졌어요 소리치면 누군가 가져다 주는데 내 삶의 끝자락에 서면 누구한테 소리쳐야 새 휴지를 받을까 새 휴지를 받으면 첨부터 아껴 쓸텐데
061 흑,백-조연호
2021-08-01
마음속에 백과 흑이 있었다 흑은 감춰두고 타인에겐 언제나 백을 보여주며 살다가 꿈틀대며 튀어나오려는 흑놈을 덧칠하고 가두었고 그런일이 반복되며 점점 무거워졌다 가끔 자기도 모르게 화가나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겁게 감추어진 흑의 인력에 빨려들기 때문이다
060 여유-조연호
2021-07-26
...여유... 여유를 즐기려면 여유를 만들기 위해 여유를 준비해야하는데 여유가 없어서 준비하지 못하고 여유와 마주쳐서는 여유롭지 못하다 일이 없어 눈 뜬 채 자리에서 뒤척이는 불편한 여유는 삶의 무게만큼 무겁다
059 검은새벽-조연호
2021-07-19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기이하게 울어대는 새벽 빛은 깨어나지 못하고 흘리지 못한 눈물이 이슬로 매달린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 무서워 보이지 않는 미래를 믿지 못하고 아침이 안오면 어쩌지 걱정하다가 검게 내려앉은 새벽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058 자화상-조연호
2021-07-11
공간의 단절로 조금씩 잊히고 섞이어 원형을 잃어버린 얼굴로 지나간 날들을 아쉬워한다 꿈이었는지 명료하지 않은 기억들이 미지의 공간에 감금되어 좀처럼 풀려나지 않는 이유는 나비의 꿈에 유배된 수인이기 때문일까 조각나 버려진 거울속에 조각나 잊혀진 부끄러운 과거가 조각조각 기워진다
057 말필터-조연호
2021-07-05
나에게도 순수했던 시절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다 같다고 생각하던. 각자의 삶의 방식이 다르듯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때,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과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 조금씩 달라졌다 정제되지 않은 나의 말에 누군가 상처받을까봐, 내 말의 메아리가 나를 해칠까봐 말의 통로에 필터를 걸었다 나이가 들어 필터에 때가 끼어 내 맘을 내 맘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오염되어갈 때 어릴적 친구가 그리웠다 기계장치의 수많은 필터처럼 교체가 안된다면 가끔은 순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 필터를 빼놓고 그 시절의 친구들과 이야기 하고싶다
056 세탁소-조연호
2021-06-28
구겨진 것들을 세탁 바구니에 담아 세탁소에 맡기려고 여기저기 찾아보니 구겨진 마음, 구겨진 하루, 구겨진 현실이 서비스 가능한 곳은 전부 셀프네
055 붉다-조연호
2021-06-20
하루를 열심히 달려와 지친 몸을 서산마루에 누이고 반쯤 감은 눈으로 이쪽 저쪽 두리번대던 태양 사선으로 누운 빛은 아쉬움으로 온통 붉다 온 세상을 밝히고도 저리도 아쉬워하는 걸, 퇴근길에 쳐다보던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붉다
054 동안-조연호
2021-06-14
친구들 단톡방에 고민하다 구매한 이모티콘을 보내는데 "뭐 좋은 일이 있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않네" 하며 아내가 눈을 흘긴다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친구들과 톡을하며 정신연령이 낮아지고 있다 친구 하나가 정신동안 이란다 친구와 톡을하는 잠깐 동안, 좋은 벗들과 오래 동안, 얼굴은 노안이 되어가도 정신은 동안으로 살아야겠다
053 서해바다-조연호
2021-06-06
빛은 먼바다로 가라앉고 바람이 잦아든 곳에 벌거벗고 일어나는 어둠의 결을 따라 한떨기 꽃이 핀다 이 강 저 강 모여든 작은 물들의 결 내가 바다다 철썩거린 한낮을 지나 이것도 바다 저것도 바다 사이 차마 떨쳐내지 못한 욕념의 결이 나선의 나신으로 하얗다 왜 무언가는 비우고 싶고 무언가는 채우고 싶을까 서해, 바다에서 바람이 부르는 노래소리 다 바다다
052 내복-조연호
2021-05-31
오늘 하루 바람이 제법 차고 추웠다 집에 돌아와 가리늦게 챙겨입은 내복이 내 몸땡이 조여온다 생일에 아내가 선물한 고급내복이 온 몸을 적당히 조이며 몸의 윤곽을 일깨운다 내복으로 촉발된 존재에 대한 인식 그것은 내 복이다
051 작업복-조연호
2021-05-23
새벽부터 출근하는 작업복 차림 남자의 옷깃이 세워지는 계절 매번 바뀐것도 없는데 나이라는 숫자에 다시 하나를 더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을이 좀 길었으면 하지만 가을은 아내의 스마트폰 갈피에 곱게 펴져 수납되었고 제 색을 내지 못해 방황하던 잎새들은 바람의 뒤안길에서 바스락대며 바스라졌다 마지막 잎새처럼 달랑대던 붉은 단풍잎 한장이 출근길 작업복 남자의 발길에 채인다 일, 일, 일만 하다가 바뀐 계절이 몆개인지. 지나는 바람에 작업복 옷깃을 여민다
078 殘日-김정태
2021-05-17
퇴근길에 창고에 들릴 일이 있어 달구벌대로를 달린다 신호에 멈춰선 도로 위의 차들 사이로 빌딩들은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수십 년 된 상가빌딩들 옆 새로 지어진 주상복합 건물은 머리 위에 비행접시를 이고 있다 미래에 멈춰 선 도로 같다 서쪽을 향해 달려가기에 내가 선 도로에는 이미 해거름이 내렸지만 비행접시를 이고 있는 건물 쪽은 아직 붉은 해가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 신호가 풀려 내가 저쪽으로 달려가든지 내가 여기에 있든지 곧 해는 질 것이다.
050 안개꽃 사랑-조연호
2021-05-17
소녀는 아픔을 잊기 위해 또 다른 아픔을 찾았고 계속 더 큰 아픔을 찾던 소녀는 아픔에 먹혀가고 있었지 그때 소년을 만난거야 소년은 아픔을 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지 소녀의 아픔은 가시가 되어 튀어 나왔고 중첩된 아픔은 핏빛 꽃잎으로 겹겹이 웅크렸지 가만히 바라보던 소년의 주위로 하얗고 작은 꽃잎들이 안개처럼 퍼지며 소녀를 안았을때 소녀는 비로소 닫힌 꽃잎을 열어 비음 섞인 향기를 소년에게 날렸지 그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고 현실의 벽에 거꾸로 매달려 말라가고 있지.
077 반세기-김정태
2021-05-11
지구에 온지 반세기 되돌아보면, 뭐랄 것도 없이 살아온 세월 몇 가지 아련한 기억 몇 가지 명징한 눈빛 몇 가지 쓴 웃음의 굴욕만이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지구에 온지 반세기 되돌아보면 미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미련이 남는다고 할 수도 없다 사실은 미련이 뭔지도 가물거릴 뿐이다 왜냐하면, 반세기를 이미 살았기 때문이다 반세기를 살다보니 내가 인생을 살았는지 연기를 했는지 헷깔릴 뿐이다 단지!
049 길-조연호
2021-05-09
가로수 옆 가로등 불빛이 밝아오는 계절이 오면 길가엔 부산한 마른 잎새들 길 따라도 가고 길을 만들며도 가네 지나온 길 되돌아보면 보이는 건 지나온 길뿐이고, 다시 길 가려면 가야할 길이 안 보일때 바람을 기다린다 지났으면 돌아보지 않고 보았으면 외면하지 않는 바람따라 날고 싶다 속으로 속으로 뜨거워지다 만들어진 상승기류 태풍에 휘말려, 격하게 날면서 길을 가고 싶다.
048 자본주의-조연호
2021-05-02
어느날 악마가 속삭였다 너의 청춘을 나에게 다오 그 대가로 네 아내와 자식들이 굶지 않게 해줄테니 나이가 들어 알게 되었다 내 아버지도 계약자였고 내 아들들도 조만간 그 속삭임을 들을꺼란걸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궁핍은 죄가 되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계약할 무언가를 갖지 못해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고귀한 무언가를 포기한다.
047 모노 드라마-조연호
2021-04-25
인생은 하나의 드라마가 아니다 희극,비극, 수 많은 장르가 있지만 주인공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많은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지만 모든 드라마를 첫해부터 마지막까지 시청하는 이는 하나뿐이고 등장인물은 많지만 고정 출연자도 하나뿐이며, 시청자들의 댓글에 내용이 바뀌기도 하지만 어떤 댓글이 달려도 주인공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046 타투-조연호
2021-04-18
나노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하여 유전자에 타투를 새길 수 있게 되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을 그리고 싶다 만사여의하게 되면 세상의 부조리를 다 없앨 수 있을텐데.
045 신의 복권-조연호
2021-04-12
어느 밤 수학적으로 로또보다 더 어려운 확률로 당첨되어 태어났는데 당첨금 수령은 어디서 하지?
044 꽃잎-조연호
2021-04-05
바람에 날리는 꽃잎에 애가타 봄비가 눈물처럼 흐르던 날 눈물 가득 머금은 몇몇 꽃잎은 슬픔의 무게를 겨우 지탱하며 애처로이 떨고 있었다 겨울이 처음도 아니건만 기다림은 유난히도 길었는데 비만 오면 생각나던 첫사랑 그 소녀를 우연히 스치듯이, 잠깐 두근거린 화사한 꽃잎이 다시 또 기다림 속으로 유영한다 꽃은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봄비 소리에 울먹이다 화사한 날에도 지는데 아직 풀리지 않은 답답한 일상 탓에 놓쳐버린 절정은 언제나 아쉽고 너무 짧다 웅크린 계절이 빨리 가버리고 발 디딜 틈도 없이 웅성거리며 화사하게 매달린 꽃잎을 보면서 사람이 너…
043 운전-조연호
2021-03-30
차를 몰고 갈때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면 안되지만 인생을 몰고 갈때는 한번씩 손을 놓아도 된다 살아가면서 목적지가 마땅히 없을때 어디를 정하지 않고 드라이브 하듯이 즐기며 산다고 딱지 끊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 무언가 보이면 또 그리로 가다가 어느 한적하고 높다란 언덕에 오르면 얼마나 왔는지 돌아보아도 좋다 그렇게 가다가 가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곳에선 새로운 안내자가 기다리고 있을테니.
042 네비게이션-조연호
2021-03-21
인생길에도 올바른 네비가 있어 목적지를 설정하고 안내 받으며 길을 가고 싶다 세상에 떠도는 수 많은 네비들 중 길 찾는 자를 위한 네비를 찾기 힘든 이유는 길은 수시로 변하는데 업데이트 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041 잘못-조연호
2021-03-14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 행위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인간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 행위에서 자신의 당위를 찾는 것은 인간의 잘못이다.
040 윤회-조연호
2021-03-08
샤워를 한다 수 많은 물줄기, 나를 때리며 지친 몸뚱이 때를 물고 흩어졌다 모여 흘러간다 오래 전 하수로 흘러 육도를 돌고 정수장 수문을 지나 새로 태어난 물이 나를 씻고 또 흐른다.
039 별-조연호
2021-03-01
오늘 일이 좀 밀려 별 보고 출근했다 별 보고 퇴근했다 퇴근하다 별을 보며 그래도 하늘 쳐다볼 여유는 있나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076 점검구-김정태
2021-02-22
천장공사를 하다가 등박스에 점검구를 숨겨두기로 하였다 해나 우찌되까 싶어 그랬다 천장과의 유일한 통로 등박스의 점검구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등박스의 점검구는 집을 허물때까지 열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점검구는 필요한 것이다 공사를 하는 김에 내 인생에도 점검구를 달아 가끔씩 열어 보며 살 일이다.
038 잃어버린 하루-조연호
2021-02-21
변화가 없는 하루를 산다 먹고 살기 위해 매일 같은 일을 하고 반복된 일상 속에 침몰해 간다 태초에 낙원의 일상에도 권태로움은 있었을 것이다 낙원의 그 여인이 금단의 열매를 베어 문것이 단지 뱀의 속삭임 때문일까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강박에 두리번거리며 하루를 살다가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지는 해를 바라보는 하루는 잃어버린 날일까
075 미련한 사람-김정태
2021-02-15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는 사람 힘든지 안 힘든지 직접해봐야 아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안 될 것이라 말려도 하다가 실패해봐야 아는 그런 미련한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뼛속, 가슴 속까지 상처로 가득한 그런 사람이 나라는 사람이다 먼 훗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미련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037 자전거-조연호
2021-02-14
오르막이 끝나면 내리막인데 오르다 오르다 너무 힘들어 되돌아 내려가는 오르막을 만나면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 누구나 인생에서 서너번 만나는 마의 오르막 고개, 넘을 때는 끝이 없어도 올라서면 보이고 넘고나면 추억이다.
036 은행잎은 왜 노랗게 물드나-조연호
2021-02-07
행여 못보고 지나갈까 가지마다 메어놓은 사연 돌아올 계절을 기다리네 바람이 머무는 터미널 어디에서나 보이는 커다란 나무에 달이 떠오르면 노랗게 걸린 잎새들 하나 둘 휘날리다 가지 끝에 걸린 돌아올 계절에 제 할 일 다한듯이 떼구르 굴러가네.
035 가을비사-조연호
2021-02-01
저 깊은 산 나무 밑에 묻어둔 습기와 바위 틈새 차가운 기운들까지 따사로운 햇살에 취해 졸졸이 흐르며 봄을 보내고 새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승천하는 여름을 보내고 차마 내리지 못한 애증과 미련으로 하늘가에 머문다 새로이 만난 격정으로 터트러져 바람에 날린다.
034 꽃-조연호
2021-01-25
긴 기다림 끝에 피어나 잠깐의 화려함을 슬퍼하는 아름다운 꽃아 너는 피고 또 지기에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야해 아름다움이란 일상에서 벗어나 떠나는 미지로의 여행 같은 것 처음 고를땐 자주 바라보며 이뻐하다가 이제는 바라보지 않는 빛바랜 벽지나 장판처럼 변화가 활력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해
074 코로나19-6 김정태
2021-01-18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발생한지 일 년이 넘었다 모두들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일상을 영위해가고 있다 숨쉬기가 힘들다 얼굴이 이쁘면 무엇하랴 눈만 보이는데 돈이 있으면 무엇하랴 갈 곳이 없는데 모든 식당이 밤 구시면 문을 닫는다 통행금지가 생긴 것이다 이제 인류가 염원하던 평등한 세상이 온 것이다 우리가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평등한 세상이 온 것이다 낮에는 일이나 하고 그저 밥이나 끓여 먹고 밤에는 잠이나 자는 그런 세상이 온 것이다 평등해서 좋기는 하다마는......
033 휴일-조연호
2021-01-17
일이 없어 쉬어가는 휴일 미처 꺼놓지 못한 알람에 눈을 떠 뒤척이다 바라본 동쪽 하늘은 갓 태어난 태양을 품었다 채 여물지 못한 붉은 태양이 어린 날에서 갑자기 커버린 아이를 보듯 잠깐의 무관심 뒤 일정 시간을 건너 뛰어 하얗다 태양아 너에게도 희노애락이 있느냐 구름아 너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었더냐 창가에 스치는 바람이 속삭이는 말 나도 가끔은 쉬어가고 싶어요.
073 구구단-김정태
2021-01-11
창고이전을 하다가 점심시간이 돼서 근처 식당을 찾았다 창고가 외딴 곳에 있다보니 식당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들판 중간에 조립식으로 지어진 돼지국밥집이 있었다 주문을 하고 앉아 있으니 창문 위에 손 글씨로 씌여진 구구단이 붙어 있었다 에이포 용지 네 장에 큰 글씨로 씌여 있었다 '저건 무슨 용도일까?' 반찬을 내놓는데 들판 중간에 있는, 작은 공장들이 드문드문 있는 곳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음식이 아니었다 너무 깔끔하고 정갈하였다 주문한 음식이 펄펄 끓는 뚝배기에 나왔는데 상에 놓기가 힘들어 보였다 동료에게 물었더니 문 연지가 일 년 정도…
032 화살표-조연호
2021-01-10
산은 언제나 하늘을 지향한다 하늘을 향해 조금씩 연륜을 쌓아가며 높아져 가다가 무위하게 쏟아지는 각종 살들로 겸허해진다 저 높은 허공을 하늘이라 한다면 언제나 하늘을 가리키며 허공에 닿아 있는 산은 하늘 방향의 화살표다 화살표의 방향엔 언제나 지향점이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화살표를 품는다 산은 하늘을 강은 바다를 바람은 뜨겁게 달아오른 열정의 빈 대기로 흐르는데 나의 화살표는 어디를 향하는가 시리게 푸른 가을 아침 갈길을 잃고 서성이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차다.
072 신년계획-김정태
2021-01-04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무엇을 할까? 곰곰히 생각을 해본다. 예전처럼 하고 싶은 것이 그닥 없다. 나이가 들었나? 반문을 해본다. 나이가 들기는 했지...... 쓴 웃음만 나온다. 되돌아보니 신년이면 늘 신년계획을 세우기는 했다. 그러나 일생을 따지고봐도 실천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냥 살자,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더라' 올해는 꾸다 만 꿈이나 실컷 꾸어야겠다.
031 신년계획-조연호
2021-01-03
신축년이니 신축성 있는 계획을 세워 다 지켜야지.
071 봄을 팔다-김정태
2020-12-28
동이 덜 튼 거리를 한 가득 가방에 봄을 담아 길을 나섰다. 이 거리 저 거리 전을 펼치고 봄을 팔았다. '이 보시오, 내 봄을 사 가시오.' 외치고 또 외쳤다. 봄은 생각보다 잘 팔렸다. 봄을 가득 담은 가방은 차츰 가벼워졌고 전을 펼치는 것이 한결 쉬워졌다. 가방은 이내 비워졌고 비워진 가방에 무엇을 담을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순간, 텅 빈 가방에 담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봄은 모두 팔았는데...... 나, 봄을 팔아 먹고 산 것 밖에 없구나!
030 중독-조연호
2020-12-27
독으로 지칭되는 유해물질에 대한 신체증상을 중독이라 한다는데 안락도 독이 되는지 시나브로 변해가는 나는 안락중독자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는데 뒹굴거리면서도 안락에 취해 잠이 오지 않는거 보면 제법 중증인 갑다.
029 왜냐하면-조연호
2020-12-21
나는 밥을 먹는다 왜냐하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나는 똥을 쌌다 왜냐하면 마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잠을 잤다 왜냐하면 졸렸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 왜냐하면...... 왜지?
028 1+1 조연호
2020-12-13
편의점에서 커피를 고르다가 눈이 갔다 삶에도 이런 것들이 하나쯤 있으면 좋으련만, 삶의 편린조차 언제나 단품이고 제 입맛대로 고르기도 쉽지 않다.
027 세상-조연호
2020-12-06
세상이 어찌될라고 이런 일이. 이런 말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도 있었다는데...... 세상이 어찌되진 않나보다.
026 똥-조연호
2020-11-29
누구나 뱃속에 몇 키로 있을텐데 제 속에선 모르다가 살짝만 떨어져도 구리다.
025 꼰대(자기만 옳은 사람)-조연호
2020-11-22
세상에 꼰대가 너무 많아 딱 나 정도만 살면 될텐데...... 이런!
070 만추-김정태
2020-11-16
겨울이 오기 전에 벼르고 벼르다 창을 떼어내고 청소를 한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내내 쌓인 먼지를 닦아내니 내 마음의 먼지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시계 바늘은 어느듯 세 시를 넘기고 있었고 떼어낸 창문 밖엔 해거름이 깔리고 있었다. 창을 떼어낸 창틀은 하나의 액자가 되었고 그 너머 멀리 보이는 풍경은 순간 그림이 되어버렸다. 그림 속은 온통 울긋 누릇 하였고 구경하다 넋이 빠진 잔일은 넘어 가기 싫어 한껏 버티고 있었다. 그림 속 사람 하나 나는 거기에 있었다.
024 제비-조연호
2020-11-15
어릴적에 강남으로 떠난 제비가 반백이 넘는 나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강남 땅값이 비싸서 다른 나라로 가버렸나 세상 물정을 조금 알아버린 어느 날 이후로 착한 일 지수가 낮아져 박씨에 대한 기대감은 예전에 없어졌지만 돌아오지 않는 제비에 대한 그리움은 제비와 함께 떠난 어릴적 꿈처럼 아련하다 나의 제비는 언제쯤 돌아올까?
069 덮어쓰기-김정태
2020-11-10
스치는 생각, 급하게 스위치를 켰다. 문서를 연다. 탁탁다다닥탁,탁탁,다다닥 계속 쓸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눈을 감는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은 칼라풀 했다가 올 화이트로 색전환을 했다. 스케치한 문장을 늘린다. 다다다닥, 탁탁탁닥, 다다다닥닥. 둘째 연이 만들어졌다. 다시 눈을 감는다. 화이트에 블랙이 약간 섞여서 회색빛이 되어간다. 아직 군데 군데 화이트가 블랙에 저항한다. 그러나 이내 무너진다.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제목을 넣고 일단 저장을 한다.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신다. 그리고 담배를 한 개피 문다. 휴-길게 연기를 내어…
023 담쟁이 소고-조연호
2020-11-08
울산을 벗어나는 고속도로 입구 고가차도 시멘트 벽면에 그들은 매달려 살고 있었다. 차가 막혀 서 있다 발견한 그들은 그 차가운 벽면에 뿌리를 내리고 어떤 환경에서라도 살며 사랑하고 번져 나간다는듯이 온 벽을 다 덮고 있었다. 처음 그들을 보고 글을 적을 때는 도시의 조형물을 표현하듯이 그것들이라고 썼는데 쓰다가보니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아 그들이라 바꾸었다.
068 2020가을-김정태
2020-11-02
'팍-' 모니터가 검게 변했다. 대기상태로 삼십분을 넘은 것이다. 써지지 않는다. 끄지 않고 그대로 둔다. 열쇠를 챙긴다. 현관문을 닫는다. 삐리릭- 자기력을 감지하고 잠긴다. 사십 미터가 넘는 콘크리트 기둥 밑 땅에 박힌 십자가, 지나서 다음 십자가 신천을 따라 길게 늘어선 끝없는 교량 오른 쪽으로 서서히 육지가 움직인다. 강 건너 각진 건물들, 그 뒤로 어릴 적부터 있던 산, 묘한 조화를 아직도 이루어가고 있는 중이다. 언제까지 갈 것인가? 신천대로를 따라 양 옆으로 펼쳐진 콘크리트 집합체. 세월은 미세한 실금을 만들고 그 실금 사이에도 가을은 스며들고 있었다…
022 수영-조연호
2020-10-31
삶의 바다를 헤엄치는 이들은 물에 뜨는 법을 익혀야 한다 물에 뜨게 해주는 것은 빠지지 않게 허우적대는 몸짓이 아니고 온 몸에 힘을 빼야하는 믿음과 각오다 웃어라 자신의 삶이 유쾌할 때 터져 나오는 웃음에는 긴장이 없기에 군더더기 힘이 안 들어가고 자연스레 떠 오른다 삶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건 일단 떠 올라야 하고 이동하는 건 그 다음의 일이다 유쾌할 때 웃는 건 어렵지 않다 그것은 마치 무릎까지 오는 물가에서 땅 짚고 헤엄치는 것 처럼 쉽고 자연스럽지만 언제나 우리 삶은 제 키를 넘어 넘실대고 뜨지 않는 자들을 허우적 되게 만든다 스스로에 대한…
067 전기쿠커-김정태
2020-10-26
이사를 오면서 가스렌지를 설치하지 않았다 집에서 음식을 해먹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렌지를 두대나 두고 간혹 즉석식품을 데워서 먹곤 했다 비가 오거나 움직이기 싫을 때는 가스렌지를 설치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래서 쳐박아 두었던 전기쿠커를 꺼냈다 라면을 끓여먹을 생각으로 쿠커에 물을 붓고 끓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작동을 표시하는 램프가 꺼져버렸다 '오랫동안 안 써서 고장났나?'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꺼졌다가 다시 불이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물은 끓었고 라면과 스프를 넣고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나는 전기쿠커를 유심히 관찰했다 쿠커는 …
021 미리내-조연호
2020-10-25
우리가 별이라 부르며 올려다 보는것은 언제나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뿐이지만 그 주위로 아이별들 독립을 꿈꾸며, 때론 일탈을 이야기하며 서성이는 밤에 일탈과 독립의 유혹은 원심력이 되어 달아나고 모성은 늘 그만큼의 인력으로 다독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별을 갖고 우주의 방랑자가 되어 떠돌다가 먼 먼 우주를 빛의 속도로 달려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각각의 인연따라 속삭이고, 어우러진 소리들이 밤하늘에 흘러도 제 갈길 바쁜이들 듣지 못하고, 청순한 대기에서 노래하는 미리내는 새벽부터 육도를 돌아 도도하게 흐르는 인연의 강이 되어 오늘밤도 흐르…
066 텔레파시-김정태
2020-10-19
인터넷 시대가 시작되면서 익명의 시대가 되었다 헐뜯고 욕하기를 아무렇게나 한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면서 익명도 모자라 익면의 시대가 되었다 누구나 다 마스크를 껴서 눈만 보인다 모르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고 눈빛으로만 대화를 한다 오래지 않아 인간은 말없이 대화를 할 것이다 바벨탑을 다시 쌓을 것이다 그리고 온 땅에 언어가 하나될 것이고 온 땅에 말도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은 텔레파시이다.
020 십년-조연호
2020-10-18
십년 전으로 돌아 간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해봐도 잘 떠오르지 않던 중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 십년 후 미래의 내가 그렇게 소망하던 날이 바로 오늘 오늘은 무엇을 할까? 향후 십년 간의 기억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무얼해야 할지 모르는건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이 잘못 살았다는 반증은 아니고 현재를 모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현재의 인식은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 산책이나 하며 생각해 봐야겠다.
065 유리속 하늘-김정태
2020-10-12
고가도로 밑 몇 년 전 새로 지어진 빌라는 중앙 계단실의 유리가 멋지다 푸른빛이 감돌고 윗 부분은 아치 모양이다 가을이라 하늘이 푸르다 푸른 하늘엔 구름이 군데군데 떠 있다 유리에 비친 하늘은 푸른빛이 더해져 진짜보다 더 푸르다 바람이 분다 구름은 북쪽으로 흘러간다 유리 속 구름은 서쪽으로 흘러간다 저 구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유리 속에도 하늘이 있다 진짜보다 더 푸른 하늘이 있다.
019 산책-조연호
2020-10-11
성안동 둘레길을 구부러진 모양따라 걷다보면 햇살도, 바람도, 나무와 나무 사이로 휘어진다 울퉁한 길과 불퉁한 둔덕에 바람의 결을 따라 일렁이며 수묵의 음영으로 스미는 햇살은 처서즈음 때 아닌 봄 아지랑이로 나그네를 희롱하고, 구부러져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언제나 그 너머에 비경을 감춘다 스쳐 지나는 바람에 계절을 잊은 채로 한굽이 돌고 땀 식으며 서늘해진 맘 햇살따라 또 한굽이 돌고 이제나 보이려나 돌고 돌다가 세상사 시름이 새어나와 그림자 길어지면 지는 해와 함께 휘어진 길에 남겨두고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간다.
064 한로 즈음에-김정태
2020-10-08
아침부터 바람이 심상찮더니 하루 종일 찬바람이 분다 추석이 며칠 전이었는데 벌써 겨울 흉내를 낸다 오후에 걸어본 거리엔 낙엽들이 제법 뒹군다 스산하다 을씨년스럽다 찬바람에 내 마음도 말라간다 집으로 와서 달력을 보니 한로였다 상강이 지나면 이 가을도 끝인가? 어둠이 밀려오고 밤은 깊었다 시커먼 밤하늘에 외로운 별 하나 떠 있다 노래하기엔 별이 너무 외롭다 슬퍼하기엔 별이 너무 반짝인다.
018 마스크-조연호
2020-10-04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생활화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도시 곳곳 나무와 가로등에 마스크처럼 씌어져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소통을 위한 간격이 있는데 마스크를 안 쓰면 일도 할 수 없고 밥 먹으러 갈 수도 없는 이상한 시간을 살아가며 멀어진 거리만큼 진지해져야 하고 없으면 어색한 어느새 익숙해진 일상. 자신의 이야기보다 상대에게 집중하라는 침묵의 계율로 묵언수행중이다.
063 길 위의 두 남자-김정태
2020-09-29
조연호시인에게 길을 가고 있었다 느닷없이 길을 물었다 나도 모르니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길 위에 있었다 나도 길 위에 있었다 길은 방향성을 가진다 때론 방향성을 가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와 나는 같은 길 위에 있었다 그래서 우린 친구가 되었다 출발할 때부터 모두 알 필요는 없는것이다 함께 알아가고 함께 갈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다 손을 꼭 잡고 가지 않아도 된다 이런 저런 이야기하며 말동무가 되어 함께 갈수만 있어도 좋은 것이다 수없는 이야기를 길 위에서 나누었다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야기는 계속될…
017리바운드-조연호
2020-09-27
내가 던진 농구공이 나에게 혹은 나의 주위로 튕겨 날아올때 그것을 받아들고 다시 던지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이 몇 쿼터 어디쯤인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고 얼마나 남았는지 잘 모르지만, 분명한건, 아직 게임 중이며 그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던지지 않으면 골은 없고 튕겨져 나온 공을 되잡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의 공이 되어 경기의 주도권을 빼앗기는것. 공은 언제나 내가 던진 방향으로부터 되돌아 온다.
062 점심-김정태
2020-09-22
오랜만에 들린 단골식당 집에서 꽤나 멀지만 오늘은 왠지 그 식당 밥이 생각났다 바빠서 정신이 없는지 내 인사를 받지도 못하고 아주머니는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늘 먹는 정식을 시키곤 기다리고 있는데 그제사 여유가 생겼는지 아주머니는 인사를 한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 남은 빈자리에 남자 두 사람이 앉는다 자기들이 들고 온 듯한 분무기로 알코올을 뿌리고 닦여진 테이블을 또 닦는다 아무리 코로나가 유행이라 하지만 중년 남자들이 그러니 웃음이 나온다 한 남자는 고지식한 얼굴에 나이는 육십 정도 보였고 한 남자는 오십이 넘어 보이고 후배인듯 앞에 앉…
016 知音-조연호
2020-09-20
-김정태 시인에게 '바다야 바람주렴' 이란 나의 글에 운율을 담아주고 같이 노래하던 벗이 있다 우리는 시인의 삶에 대해 토론하며 차를 마셨고 새롭게 떠오른 생각들을 공유했다 하루가 가는 소리를 듣는 방법과 그것에 귀 기울이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에게 배운 것과 그에게 보인 것이 내 글의 반이고 나머지 반은 성찰 혹은 장난이다. 매미가 운다 오랜 인고의 세월을 홀로 감내했다고 나는 이만큼 성장했다고 온 몸으로 울어대는데 그의 노래를 온전히 들어줄 벗이 있을까 저기 나풀대는 나비의 춤이 맴 맴 맴돌며 나무 주변을 선회한다.
061 운무-김정태
2020-09-15
창문은 가슴을 연 채 조금씩 길어져가는 밤을 홀로 지샜다 선득한 기운에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소나기가 알람을 해고시켜 버렸다 동이나 텄을까 눈을 감은 채 상상은 콘도르가 되어 긴 날개를 펼쳤다 '눈을 떠야 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면 이런 기분일까? 서두른다 먼 길을 가야하기에 서두른다 고가도로 끝 바라보이는 산 뚫어놓은 구멍이 줄지어 선 그들을 삼킨다 이 세계에서 사라진다 아, 그들이 사라진게 아니었다 구멍 속에서 안개가 되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나는 콘도르가 되어 그 구멍 속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015 교향곡-조연호
2020-09-13
비가 그친 서쪽 하늘 제 속을 모두 비워 풀린 응어리 사이로 神의 손길이 스민다 파랗게 시작한 균열은 세상의 부정을 모두 태우려는 듯 점점 붉어지더니 하루를 마감할 즈음엔 지옥의 교향곡을 연주한다. 함부로 살지 말아라 삶을 낭비하지 말아라 늘 지켜보고 있다는 듯 온 하늘을 덮는다. 하루가 가고 있다 나는 오늘 무얼 했지......
060 꿈-김정태
2020-09-08
그때가 장마였던가? 어린 시절 교실을 새로 짓는다고 오후에 학교엘 갔었다 강이 시원하게 바라보이는 문을 열고 배를 깔고 숙제를 하고 있었다 뒤 안에서 다급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고 놀란 어린 나는 후다닥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쳐 나갔다 이윽고 내가 살던 집은 큰물에 정확하게 반이 떠내려갔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휴- 꿈이었구나! 잠시 동안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내 꿈은 떠내려갔다 잠을 자지 않을 때에도 나는 꿈을 꾼다 미래의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이 변형된 형태로 꿈에 나타나곤 한다 미래의 꿈도 지나고 나면 …
014 물망-조연호
2020-09-06
비가 내리는 날 나비들은 모두 어디로 갈까? 비가 몹시도 내리던 날 성안 옛길 한 모퉁이 님 향한 사모침에 양잎 모돠잡은 물빛 꽃잎이 고개 숙인다 화창한 어느날, 주는 것도 없으면서 꿀만 빼간다고 투덜거린 말 속에도 증기는 스미고, 그 작은 알갱이들 모이고 모여 우화등선하는 그 날에도 무지개는 떴었는데 보지 못하고, 이제는 모두 떠나버린 비 내리는 길가에서 잊지 말라 애원하며 하늘 이는 몸짓과 날개짓에 휘어지는 무지개를 소망한다.
059 무지개-김정태
2020-08-30
장마가 끝났다는데 맑았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곤한다 종잡을 수없는 날씨다 오늘도 현장인 화왕산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늘이면 마감을 할수 있으리라 오후 세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아.....두 시간만 참아주지' 아쉬웠지만 정리하고 현장을 출발하였다 대구로 오는 길에 테크노폴리스를 지나가고 있는데 멀리 유가사 쪽에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라는데 그냥 붉은색과 푸른색이 보였고 그 사이에 노란색이 있었다 그래도 무지개는 아름다웠다 무지개쪽으로 점점 가까이 가자 희미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무엇이나 일정한 거리가 있을때 가장…
058 지상철-김정태
2020-08-30
장마가 한창이어서 비가 왔다가 그쳤다가 하루 종일 해 보기가 힘들다 건들바위 네거리를 지나서 명덕역 방향으로 작은 고개를 지나서 아침 일찍 가고 있었다 명덕역 근처에서 신호에 걸려 정차하고 있는데 왼쪽 편에 지상철 콘크리트 기둥들이 밤새 비를 맞았는지 축축하게 젖어서 저마다 이마에 번호를 붙이고는 꿋꿋하게 서 있었다 무얼하고 있는 것일까? 중앙선에 제 몸뚱이를 박고서는 가끔 지나가는 지상철을 기다린다 지겨워서 소리를 지를만도 한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뜨나 조용하게 그렇게 서 있었다 내 이마에는 어떤 번호를 붙일까? 몇 번이길래 이 자리에…
013 침대, 도면....-조연호
2020-08-30
결혼을 늦게 하다보니 나이에 비해 아이들이 어리고 '에구, 언제 다 키워? 애들 키우려면 칠십까지 일해야겠네.' 하는 소리를 주위로부터 많이 들었는데 걱정보다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에 미소짓는 것이 나도 아버지가 되었나보다. 언제 클까 싶었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침대를 갖고 싶다하여 조립식 침대를 사서 하나씩 조립을 하는데 조립도면을 보고 하나하나 맞추어가다가 볼트가 안 들어가 도면을 자세히 보고 조립한 것과 비교해보니 거꾸로 조립을 해서 다시 해체후 재조립을 했다 조립을 끝낸 후 아이들은 놀러 나가고 방금 조립한 침대에 누워있자니 시상이 떠올라 …
012 조문-조연호
2020-08-23
고향친구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조문을 하러 나서다가 사회적 거리두기, 집합금지 명령 등의 어구들이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하고 길을 나섰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려니 입구 유리문에 전면통제라는 커다란 글씨가 보였다 들어가도 되는지 한참을 망설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온사람 몇명이 이쪽 저쪽 모서리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어 떠나신 아버님과 친구에게 인사한 후 비어 있는 반대편 구석에 앉으니 그나마 빈 구석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조문객이 오고 망자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 한쪽 구석 사람들이 나가고 도우미분이 익숙한 몸놀림으로 상을 …
057 2020여름휴가-김정태
2020-08-17
오십 여 일간의 장마 지긋지긋했던 장마는 때가 되니 가버렸다 장마가 끝나고 해가 뜨더니 이때다 싶은 더위가 잃어버린 위용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뿔싸, 한 발 늦었군! 닷새간의 휴가가 시작 되었다 휴가의 주제는 '방콕'이었다 태국의 방콕이 아니라 방에 '콕' 쳐박혀 있었다 나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았다 아뿔싸, 벌써 끝났군!
056 장마, 그리고 화왕산-김정태
2020-08-17
현장이 화왕산이다 봄이 한창이던 때에 시작했으나 아직 끝내지 못했다 곧 장마가 시작될텐데 걱정이 슬슬 되었다 현장이 있는 화왕산으로 가려면 읍을 지나 국도 5호선을 타고 내려가다가 계성면으로 빠졌다가 들어가야 한다 고속화된 국도 밑에서 좌회전이면 계성면 우회전이면 하필 장마면이다 출근하면서 늘 장마에만 빛나는 곳이군!하고 농담을 하곤 했다 올해 장마는 처음엔 마른장마라고 했다 장마라곤 했지만 비가 거의 오지 않았다 오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것이 한번 시작된 비는 사흘씩 내리기도 하고 일주일씩 내리기도 하고 국지적 물 폭탄이 쏟아지곤 했다 헤어지는 …
011 시인-조연호
2020-08-16
글은 머리로 쓰는게 아니고 엉덩이로 쓴다고들 한다 어릴때부터 주변으로부터 똑똑하다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들었고 대충해도 남들만큼은 하는 나를 경험하면서 진득함과는 거리를 두고 성장한 어른이 된 나를 바라본다 얕다 작은 일렁임에도 그 바닥이 보이는 얕은 호수처럼 깊이가 없다 남들처럼 진득하게 무언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되돌아 왔을때 만났던 것은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웅크린 시인의 감성이었다 나는 시를 섰고, 시집도 한 권 내었으나, 천성처럼 지루해졌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문학은 슬픔의 축적이지 즐거움의 축적은 …
010 시야-조연호
2020-08-09
내가 사는 성안동은 산 위에 형성된 마을이라 옥상에 올라가면 제법 전망이 나온다 와이프와 함께 옥상에 올라 울산의 야경을 바라볼 때 저무는 하루를 보는 시야와 불 켜지기 시작하는 고층 아파트를 바라보는 시야가 얽힌다 한곳에서 한 방향으로 보면 보이는 것은 비슷하지만 보는 것은 언제나 다르다 보이는만큼 보는 것이 아니고 보는 만큼만 보기 때문이다 모든 분쟁의 씨앗이 여기에 있다.
055 누수-김정태
2020-08-05
근 일주일가량 비가 내렸다 콘크리트 이층집이지만 수십년을 넘긴 집이다보니 군데군데 물이 샌다 특히 판넬확장부분과 처마부분이 심하고 거실 중간에도 물자국이 번졌다 옥상방수를 해야 된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 물이 한방울씩 떨어져 처마를 보니 군데군데 수성도료가 떨어지고 있었고 몇 군데는 녹슬은 철근도 보인다 보수를 해야 할 것이다 집을 보수하는 김에 내 인생도 보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묻힌 김에 보수하면 싸지 않을까?
054 2G종료-김정태
2020-08-04
스마트폰 시대에 여전히 나는 2G를 사용했다 장마가 한창이던 월요일 새벽 화면에 안테나표시가 사라지고 미등록단말기라는 단어가 떠 있었다 순간 뭐지?라고 생각했다 그 의미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2G서비스를 종료한다고 벌써 몇 달 전부터 난리였다 나는 갈데까지 가보자라며 끝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미등록단말기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복잡미묘한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도 잘 살지 않았던가? 휴대폰은 있지만 통화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 단지 그 사실! 단지 그것뿐…
009 꽃-조연호
2020-08-02
작은 일을 매일 실천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화초에 물을 주지 않으면 꽃을 피울 수 없듯이, 웃지 않으면 웃을 수 없듯이. 하루하루 죽어가는 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길은 같고 어떻게 해도 거기까진 가지만, 이루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고, 물 주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않는다.
008 이름-조연호
2020-07-26
내가 그 꽃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꽃은 지고 또 피겠지. 입안에 맴도는 차향을 음미하며 참새의 혀는 어떻게 생겼나 생각해 본다 이름없는 것들이 이름없이 떠돌다가 인연의 속박으로 나에게 다가올때, 그것들은 내 이름의 편린이 되어 나의 시간 속으로 동화된다. 나의 이름은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로 불려질까. 길가에 노랗게 핀 저 꽃의 이름은 뭘까.
053 세남자-김정태
2020-07-20
내가 사는 좁은 골목에는 이층집이 모두 네 채이다 한 채만 빼고 이층에는 독거중년이 각각 한 명씩 살고 있다 처음에 내가 이사 왔을때 두세번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였지만 그들은 지금까지도 먼저 인사를 하는 법이 없다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들인가?' '낯을 가리는 사람들인가?' 별별 생각을 다해 보았다 나도 그렇지만 아침에는 출근하기 바빴고 저녁엔 들어와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있었다 대화할 사람조차 없으니 당연한 것이다 밤 열시가 넘으면 여기가 과연 사람 사는 곳인가를 의심할 정도이다 그러다가 벌써 반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내가 이사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
007 반감기-조연호
2020-07-19
첫사랑의 기억이 강렬한 이유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사랑의 감정이 희석되기 전에 끝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줄어드는데 짙어지는 감정들은 나날이 새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마음들을 흘려보내고, 나를 설레게하는 마음들을 음미하며 하루를 살아야지 하고 바라본 하늘, 어제부터 내린 비가 탁한 기운들을 흘려보내고 청명한 하늘을 보여준다 버릴것은 애쓰지 않아도 버려지고 더할것은 애써야만 더해진다 반감기, 어떤 양이 초기값의 절반이 되는데 걸리는 시간, 우리들의 마음 속 감정들은 그 반감기가 그리 길지가 않…
052 갓바위-김정태
2020-07-13
동신교 옆 바로본 병원 마당에서 신천 건너 동인동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 지어진 고급고층아파트 뒤로 하루의 종말을 고하려는 해가 딱 걸려 있었다 지지도 못하고 뜨지도 못하고 그냥 머물고 있었다 저 해만 넘어가면 곧 저녁이 될 텐데 자꾸만 고급고층아파트 사이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파트 사이에 지는 해가 끼여 성인들 그림에 나오는 밝게 빛나는 후광을 만들고 있었다 고급고층아파트들은 하나같이 갓을 썼다 둥근 갓, 네모난 갓 시대에 따라 갓의 유행도 바뀌는 법이다 순간, 커다란 돌 위에 갓을 쓴 팔공산 갓바위가 보였다 팔공산 갓바위가 도탄에 빠진 우리를 구하시려 하산…
051 장마-김정태
2020-07-13
일년에 꼭 한번은 왔다가는 장마 올해는 마른 장마라고들 하였다 벌써 장마가 시작 되었다는데 오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오전에 왔다가 오후엔 그치고 밤에 소나기처럼 왔다가는 아침엔 개이고 도대체 일기예보를 믿고는 일정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어제 오늘은 장마같은 아니, 장맛비가 내린다 '어, 친구 늦어서 미안해' 장맛비가 나에게 말한다 '늦어도 오면 되지 미안할 필요까지는 없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예정된 것이라면 꼭 오는 모양이다.
006 아침-조연호
2020-07-12
모처럼 휴일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마음 속에서 일렁이는 무언가를 잊고 지낸 시인의 감성이 작은 파문으로 깨어나는 아침에 어떤 글귀로 세상에 나와야할지 망설이고 있다 비가 내린다 수 많은 방울들이 바람에 흩날리다 창가를 두드린다 번지며 녹아드는 작은 인연들, 잠에서 깨어나라고 소리없이 두드리고 있다.
005 민들레는 왜 그곳에 피었나.....-조연호
2020-07-05
달마가 동으로 간 이유를 뜰 앞에 피어있는 민들레가 노래하네 바람부는 날 제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 하다가 나비의 날개짓에 허공으로 방사한 민들레 훨훨 날아 뜰 앞에 피었네.
050 창녕, 그리고 새벽-김정태
2020-06-30
전날 현장의 도장용 자재가 부족해서 부족분을 주문하고 새벽에 찾을 요량으로 현장에서 제일 가까운 화물영업소로 향했다 너무 일찍 도착했는지 5톤 윙카는 하차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 일이 없어 주변을 서성였다 영업소 주변은 온통 논이었는데 멀리 논 중간에서 한 농부가 전날 이앙기가 빠트린 부분의 모심기를 하고 있었다 순간, 시간이 딱 멈추고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심기 할 때가 되었구나!'.
049 이주이후3-김정태
2020-06-30
철거가 다 끝났는지 펜스가 걷혔다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이십 여 년 동안 산화되었던 것이 본래대로 환원되었다 그 땅 본연의 빛깔을 되찾았다 여기 저기 공사용 자재들이 널부러져 있고 굴삭기 한 대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또다시 인간의 저지레가 시작되었다.
004 그리움-조연호
2020-06-28
그리웁다 말을 하면 그리워지는가 불꺼진 밤바다에 바람이 분다 방파제에 누워 하늘을 보니 흔들리는 별빛들이 하나둘 쓰러진다 저기 저 별은 저렇게 멀리서도 제 갈길을 가느라고 돌아보지 않는데 천명을 안다는 나이가 지나도 내 갈 길은 보이지 않고 그리운 옛 기억들만 별따라 흘러가는 밤 그리웁다 말을 하면 그리워지는가? .
048 출근-김정태
2020-06-22
오늘은 청도로 돌아서 화왕산 현장으로 향했다 불과 3Km 차이지만 재를 연속으로 두개나 넘어서 가야기에 심리적 부담이 있다 보통은 앞산터널을 통과해서 수목원 앞에서 테크노폴리스로를 타고 여러 개의 터널을 거쳐서 가기 마련인데 칠시가 넘으면 교통지옥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팔조령터널과 이서면을 지나 고속화된 20번 국도를 갈아타기 직전 들판에 안개가 자욱했다 해는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제 곧 안개가 걷힐 것이다.
047 이주이후2-김정태
2020-06-22
새벽에 해가 빨리 뜨고 저녁엔 해가 늦게 진다 여름이 기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퇴근길에 지나온 내가 살던 곳 많은 사연을 뒤로 하고 떠나온 곳 높다란 울타리로 둘러 싸여 있다 궁금하여 안을 들여다 보았다 굴삭기 한 대가 모든 것을 부셔버리고 몇 미터 남지 않은 담장만 남았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텅 빈 공간 너머로 바라 보이는 쓸쓸히 서 있는 고가도로 다리만 바라보았다.
003 손소독제-조연호
2020-06-21
사람과 사람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이 어느 순간부터 공간 속으로 스몄다 각자 입을 막고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적당히 떨어져서 거리를 거닐다 돌아오면 제 걸어 온 흔적을 지운다 바이러스가 무서운건 어쩌면 전염성보다, 문명화 사회의 이면을 현실에 투영시키기 때문이다 알콜냄새 가득한 차가운 액을 바르며 사람의 체온이 그리워지는건 아직 문명화 되지 못한 햇감성 때문인가? 망종즈음인데 창가로 부는 바람이 차다.
046 작업화2-김정태
2020-06-15
어린 시절 까치설날엔 늘 새신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다 지금 그런 설레임은 없지만 나는 새신이 늘 좋다 목수 친구한테 얻은 새 작업화를 신어 본다 어딘지 모르지만 불편하다 그러나 곧 익숙해질 것이다 낯 선 세계에 뛰어 들었을 때 처음에 불편하다가 편해지듯이 겪어보지 않은 세계는 늘 두렵고 불안하다 단지 그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지나고나면 별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새신은 언제나 옳다.
045 작업화 1 - 김정태
2020-06-15
수년째 신었던 작업화 이젠 가끔씩 흙이 들어와 발을 괴롭힌다 원하지 않던 일들이 내 삶에 끼여 들때처럼 거친 현장에서 용케 견뎠지만 이제는 버려야할 것 같다 몇 번이고 버릴려고 했지만 내 발에 익숙해져서 버릴 수가 없었다 내 삶의 방식도 몇 번이고 바꿔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처럼 긁히고 상처나고 찢어졌고 가끔씩은 흙이 들어와서 발을 괴롭힌다 버릴 때가 된 작업화를 보고 있으니 자꾸만 내 삶을 보는 것 같다 내 인생도 작업화처럼 헤지면 버리고 새 것으로 갈아 신었으면 좋으련만.
002 핀홀안경 -조연호
2020-06-14
작은 구멍으로 사물을 보면 시선이 모여 사물이 선명하게 보인다 시야가 선명했을 때는 습관적으로 누군가의 눈을 보았는데 황사가 일상화된 날씨처럼 흐려진 인생사 속에 탁한 눈빛 가리려 작은 구멍 뒤로 숨었다 나를 내보이지 않고 너는 선명하게 보려는 조금은 불손한 안경 사람들 가슴 속에 몰래 숨겨둔 제 시선만 밝혀주는 작은 구멍 안경.
044 오십즈음-김정태
2020-06-08
목장이었다 귀농이란 말조차 생소했던 시절 도시출신이 목장을 한답시고 덜컹 산촌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여름이었을 것이다 한참 축사를 손수 짓고 있을 때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일을 중단할 수가 없어 비를 맞으며 일을 계속 하였다 마침 들리신 어머니께서 '쉬어 가면서 하거라' 하셨다 이십대였던 나는 씩씩거리며 '바빠 죽겠는데 무슨 소립니까'라며 고함을 쳤다 얼마가 흘렀을까 비를 홀딱 맞으며 일을 마치고 어머니가 태워주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씨익 웃으시더니 말씀 하셨다 '야 이눔아, 일은 죽어야 끝나는거야'라고 하셨다 그…
043 드라큐라
2020-06-08
'삑-○○○' 짧은 비프음에 '휴-' 작은 흑백화면을 바라본다 우리집엔 피맛을 제대로 아는 놈이 하나 있다 정확히는 핏속에 들어 있는 당분을 좋아한다 소리없이 기어들어 온 드라큐라와 넉달째 동거 중이다 외로운 독거중년과 벗하러 왔나보다.
042 터널 속에서
2020-06-02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근무를 한 다음 일요일의 짧은 휴식 다시 월요일 아침 출근을 서두른다 사적인 일은 모두 뒤로하고 또 한 주를 시작한다 차는 방향을 가진 채 달린다 이윽고 차는 상주터널로 진입한다 멀리 밝은 구멍 하나만 보인다 좌회전도 우회전도 할 수 없다 유턴은 아예 불가능하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저 구멍 끝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기에 차는 달리는 것일까?.
041 코로나19-5
2020-06-02
지자체에서 용돈도 주고 정부에서 수당도 주었다 이상국가가 실현된 것이다 과연 자본주의는 몰락하는 것일까? 이제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그 사내 굶어죽어가는 딸을 바라봐야만 했던 그 아비의 예언대로 자본주의가 극에 달하면 온다던 그 사회가 오는 것일까? 앞날이야 어찌됐던간에 나사렛 그 사내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보다 오늘 밤 잠들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기적이고 내일 아침 눈을 뜬다면 그 기적에 감사 드릴 것이다.
040 코로나19-4
2020-05-26
대통령도,사장님도,동네 할머니도, 독재자도 모두 같은 마스크로 입을 가렸다 케케묵은 말씀이 실현된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만민을 평등케 하리라' 어디에 나오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마태복음 17장 21절이라고 하자 어차피 내용이 없지 않은가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서 우리가 애타게 찾던 그 분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너희를 모두 평등케 하리라'.
039 코로나19-3
2020-05-26
원래부터 와 계신 줄도 모르고 우리는 오랫동안 그 분을 찾아 헤매였다 장막 속에 꽁꽁 숨어 계셨으니 알 턱이 있겠는가? 장막 속에서 하느님이라 불리던 그 사내가 구십이 넘은 노구로 나타나 대국민 사과를 한답시고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큰절도 하였다 스스로 인간임을 증거하였다 성전이라던 그 장막은 이제 헐릴 것 같다 아마도 불법 건축물이었던 모양이다.
038 코로나 19-2
2020-05-21
우리가 기다렸던 고도께서 이번에는 꼭 오실 것 같다 우리들의 머릿속에 있는 그 모습이 아니라 그 분 모습대로 지상에서 그 분 뜻을 실현하시려 오실 것 같다 그 분은 인간의 입과 코를 싫어 하시어 우리는 입과 코를 가려서 그 길을 예비하였다.
037 코로나19-1
2020-05-12
모두들 마스크로 입을 가렸다 묵언수행 중인가? 입으로 지은 죄, 구업! 더 이상 말을 하지말자 구업을 닦아낸다는 진언, 정구업진언이 들린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036 좀비
2020-05-05
A.M 1:00 삼정골 부대 앞은 아직 불이 꺼질 생각을 않는다 실내 금연인 나라지만 암묵적으로 담배 연기가 알코올에 녹아드는 곳 '인 유어 헤드~~' 더 크랜베리스의 노래가 창을 넘어가자 좀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A.M 4:00 삼정골 부대 앞은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좀비들이 자리를 옮긴다 내 또래의 사내 하나 잭슨키드인지 빌리진을 듣고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가사는 아니지.....' 오직 마이클 잭슨 노래만 삼십분째다 누군가 컴퓨터로 선곡을 한다 심장에 남는 사람,단숨에..... 노래가사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잭슨키드가 잠시 소란을 피워대…
035 노브랜드
2020-04-28
국도를 따라 대구에서 김천으로 가던 중이었다 왜관을 통과할때 신호등에 딱 걸렸다 문득 오른쪽을 보았더니 커다란 현수막 하나 붙어 있었다 노란 현수막에 노 브랜드 '브랜드가 아니다. 소비자다' 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체인점인지 칠곡왜관점이라 되어 있었다 '노 브랜드'라는 새로운 브랜드가 생긴 모양이다 대표 상품은 노 캐시!
034 가로별
2020-04-21
오월이 다 되어가는 사월 하순 밤공기는 아직 싸늘하다 잠들지 못하는 밤 이층 콘크리트마당 쇼파에 앉아 하늘을 보니 밤별 대신 고가교 가로등 밝혔다 '그래, 별이라 생각하자' 가로별.
033 타도
2020-04-14
고가교 밑 횡단보도에 현수막 하나 걸려있다 육중한 다리 기둥을 배경으로 힘없이 걸려있다 '타도 ㅇㅇㅇ! 선택ㅇㅇㅇ!' 스물한번째 국회의원선거를 한답시고 시끄럽다 전세계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더 시끄럽다 하지만 선거는 해야겠지...... 극우정치인의 현수막의 문구가 우습다 타도라는 용어를 쓰던 사람들을 잡아가두었던 사람이 이제 본인이 타도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저 선거홍보용이다보니...... 그런데 왠지 현수막 뒷쪽의 육중한 다리기둥이 타도되어 현수막을 덮쳐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032 드라이브 스루
2020-04-07
맨 처음 드라이브 스루를 알게 된 것은 커피전문점이었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도 냉커피를 살 수 있었다 그 다음 나는 드라이브 스루로 햄버거를 사서 출근길에 차 안에서 먹었다 참 편리한 세상이었다 낼 것 내고 받을 것 받고 가라 어차피 스쳐갈 인연이라면 볼 일만 보고 가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드라이브 스루가 대유행이다 올해는 활짝 핀 벚꽂 구경도 드라이브 스루!
031 개나리
2020-03-31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을 달려 가면서 구미를 통과하다 보면 오래된 옹벽 위에 개나리가 줄지어 있다 몇 번의 보수를 거친 옹벽 위에 올해도 새롭게 핀 개나리가 있다 옹벽은 해마다 낡아가지만 개나리는 해마다 새롭게 핀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스쳐가는 개나리가 보인다 올해도 나에게 개나리는 그저 노란 물감일 뿐이다.
030 다시 새벽
2020-03-24
해가 지고 해가 뜨니 새벽이라 고가도로 옆 멀리 보이는 산은 꽃피는 봄에 왜 가을 흉내를 내고 있는것인가 아무런 소리도 없이 신새벽은 그기 있었다 신화들이 사라져버린 텅빈 거리엔 안개가 걷히고 신새벽 어스럼녘 거무스럼한 형상 하나는 비로소 몸짓을 시작했다 다시 새벽이다.
029 이주이후1-모자이크
2020-03-16
이십년만의 이사가 고단했던 탓일까 매일 그 앞을 지나면서도 애써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 않았다 해를 넘겨서야 이사는 마무리 되었고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꽃이 피는 삼월에서야 퇴근길에 문득 멈춰서서 바라 본 옛 자리 고가도로 위에서 가로등들이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철거공사용 비계강관이 설치 되어 있었다 네모난 비계강관 사이로 보이는 그 풍경은 수십장의 사진으로 짤린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다.
028 다운사이징
2020-02-09
이십년 간 쌓인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은 이십년 간의 삶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애증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백여 평의 짐을 이십여 평 공간에 넣어야 했다 '물건을 축소하는 기계가 있다면 좋으련만.......' 옮겨 설치한 선반에 물건들이 수납됨에 따라 옛 공간은 점점 비워졌다 공가처리가 되고 내 마음도 공가가 되었다 내 몸만 빼고 대부분 사라졌다 영화 '다운사이징'이 생각났다.
027 선반
2020-02-09
분류가 어느 정도 되고 폐기물도 정리 되었다 이젠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좁은 공간에 많은 물건을 넣기 위해서는 벽을 따라 쌓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선반을 옮겨 설치하기 시작했다 옮겨 설치한 선반에 물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제자리를 잡아갔다 비워졌던 내 마음도 다시 하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026 열쇠
2020-02-04
재개발에 의한 이사 그리고 이주 팔십일 간의 대장정 빈집이라는 뜻의 '공가' 공가처리 되고 며칠 후 다시 가본 옛 공간 '그래 空間이라는 것은 원래 빈 것이다' 주머니 속 있어도 열 것이 없는 열쇠 하나 남았다.
025 공가
2020-02-04
이십여 년 동안 이백여 평에 쌓인 것들을 팔 십일 만에 처리 하였다 처음 이사를 시작할 때가 생각난다 그 막막함이란........ 지난 이십년 동안 이사라고는 한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런 것이다 사무실 옆 마당의 쓰레기 산을 정리하고 사무실과 창고, 주거공간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이십년의 감정들도 함께 정리 되었다 새로운 공간에서의 새로운 생활 옛 사랑을 버리고 새 사랑과의 만남이었다 '공가'라는 딱지 하나 붙였더니 내 마음도 그만 비워져 버렸다.
024 이중생활
2020-02-02
이사가 어느 정도 되어가고 단수단전이 되어버려서 더 이상 이 공간에서의 생활은 불가능해졌다 떠나야 하는 공간과 새 삶을 꾸려야 하는 공간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두 집 살림을 하는 바람난 남정네의 마음이 이런걸까 그러나 이십년을 함께 한 공간을 버릴 때가 되었다 사랑했던 공간을 떠나보내고 사랑해야 할 공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023 오동나무
2020-02-02
단수단전 상황 하에서도 이사가 계속 되었고 사무실과 창고, 주거공간은 서서히 정리되고 있었다 쓰레기 산이 있었던 마당은 완전히 정리가 되어 텅 비어 있었다 마당 한쪽 담벼락을 밀면서 이십년 동안 숱한 수모에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오동나무 하나 오늘따라 왠지 쓸쓸해 보인다 '모든 것이 떠나가지만 너만 혼자 남는구나'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나처럼.
022 단수
2020-02-01
단전이 되고나니 나는 자연인이 되었다 일출과 동시에 행동이 개시되었고 일몰과 동시에 행동이 종료되었다 도시에서 졸지에 자연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중반전이 넘어선 이사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일출과 일몰이 시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오래지 않아 재개발조합과의 협의로 단수가 되었다 물이 없으니 수세식 화장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여기저기 방뇨가 시작되었다 영역을 표시하고 다니는 숫개마냥 드디어 나는 자연인에서 원시인이 되어 버렸다.
021 단전
2020-02-01
이삿짐들은 외과적 상처가 아물듯 시간이 지나면서 원하던 형태는 아닐지라도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재개발조합과의 보상시기문제로 단전이 결정되고 이삿짐 꾸리기가 한창일때 전기가 끊어졌다 이윽고 해는 저물고 이삿짐 꾸리기는 계속 되었다 점점 더 물건들을 분류하기 힘들어졌다 잠시 어둠에 적응하는가 싶더니 더 이상 물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020 부자-부유한자
2020-01-31
재개발로 인한 이삿짐은 하나둘씩 분류가 되어갔다 옮길 것과 재활용품 및 고물 그리고 쓰레기로 나눠졌다 가져가야 할 짐 보다는 버려야 할것이 몇 배는 넘었다 쓰레기는 백리터 종량제 봉투에 담긴채 마당 한구석에 쌓이기 시작했다 쌓여가는 백리터 봉투를 바라보고 있으니 '저걸 또 언제 다 버리나'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든 많이 가진 사람을 부자라 하지 않던가'
019 개복수술
2020-01-31
이십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짐들 이사를 위해서는 분류를 해야만 한다 수술환자 앞에 선 집도의의 심정이 이럴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 갈 것인가 '이제 개복수술을 할 때다' 하나둘씩 이삿짐을 정리는 하고 있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문득 십오년 전 개복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집도의의 말이 생각났다 '외과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어떠한 형태로든 아물게 되는 겁니다' 나는 다시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다.
018 평등
2020-01-30
젊은 시절 나는 늘 세상은 불평등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평등한 세상이기를 바랬다 그리고 한때 제각기 능력껏 사는 것도 괜찮은거라 생각했다 그 후 평등하지 못하면 균등 할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세상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017 빈 마당
2020-01-30
사무실 옆 공터에 이십년 동안 쌓인 쓰레기 산은 이십일 만의 진상조사로 해체되었고 쓰레기 옷을 벗어 던지고 부끄러운 듯 맨살을 드러냈다 사각 담장 안에 갖힌 마당이지만 이십년 만에 일광욕을 하는 것이었다 '참 시원하겠구나' 순간 강한 바람이 휙 불더니 아직도 바닥을 뒹구는 비닐하나를 하늘 높이 밀어 올려 버렸다 아직 미련이 남은 내 마음도 그 비닐과 함께 올라가 버렸다.
016 쓰레기산
2019-12-17
사무실 옆 공터엔 이십년 동안 쌓인 쓰레기산이 있었다 재개발로 인하여 말끔히 정리 되어야 했다 쓰레기산은 하나하나 해체 되기 시작했다 나오는 물건마다 기억이 없는 것이 없었다 이십년간의 과거가 파헤쳐졌다 사투 끝에 쓰레기산의 해체는 끝이 났다 이십년간의 과거는 단 이십여일만의 진상조사로 마무리 되었다 쓰레기산이 사라졌다 이십년간의 애증도 사라졌다.
015 도시의 여명
2019-12-10
평소보다 이른 출근길이었다 아직 어두운 도로엔 몇몇 차들만이 달리고 있었다 모두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제각기 바쁜 모양새들이다 어둠을 가르고 달리고 있었다 해가 뜨는 동녁으로 달리고 있었다 동이 가로등 불빛을 삼키고있었다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
014 2019 첫얼음
2019-12-03
입동입네 싶더니 바닥에 고인물이 어느새 얼어버렸네 어젯밤 분명 투명한 빗물이었는데 오늘 새벽엔 하얀 얼음이 되어 버렸다 낮이 되면 얼음은 다시 물이 되겠지만 내 마음은 그만 얼어 버렸다네.
013 공공의적
2019-11-26
ㅇㅇ의적 도대체 무엇의 적이란 말인가?
012 입동
2019-11-19
비바람 한번 쌩하니 불더니 빨간노란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저 멀리 보이는 창공은 싸늘한 기운 내뿜는데 겨울이 나에게로 온 것인가 내가 겨울 속으로 간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011 감기
2019-11-12
삼년에 한번쯤 강림하시는 그분이 오신 것 같다 콧물이 흐르고 기침이 난다 그분이 오신 것이 확실하다 영접에 나서야 할 것 같다 머리는 띵하고 모든관절이 아프다 어제 잠자리에 누워서는 '이러다가 죽는 거 아냐' 생각도 들었다 오랜만에 오신 그 분을 영접하다 보면 오만한 나로 하여금 한낱 인간임을 깨우쳐 준다.
010 담쟁이
2019-11-05
제 혼자 힘으론 설 수 없어 늘 담벼락을 타는 담쟁이 봄부터 부지런히 자라서 내년이면 월담을 할 것 같다 혼자서는 설 수 없는 담쟁이 잎에도 때가 되니 어느새 단풍이 들었다.
009 단풍
2019-10-29
올봄 서로 다퉈가며 새싹을 튀웠을 녀석들 긴긴 장마에 뿌리 채 문드러진 것들도 있을 것이며 모진 바람에 잔가지 찢겨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뜨거웠던 지난 여름 그 얼마나 자라렀던 그 얼마나 푸르렀던 때가 되면 모두 가을을 맞는 것이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들은 더 슬퍼하려 온 몸을 멍자국으로 핏자국으로 자축하는 것이다.
008 초보운전
2019-10-22
출근길이었다 오르막에 차 한 대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앞질러 가버릴까 하다가 뒤에 서서 그냥 기다렸다 뒷 유리창에 '초보운전'이라는 딱지가 애절하게도 두 개나 붙어 있었다 삼십년 전 그때가 퍼뜩 생각이 났다 그리고 지난 삶을 되돌아 보았다 내 인생도 '초보운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다.
007 알로카시아
2019-10-15
친구 빵집 뜨락에 몇 년전 개업식때 들어 온 화분 하나 용케 아직 살아 있다 잎이 넓은 것이 생긴 것 만으로도 고향이 더운 곳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곧 추워질텐데...... 여름 내내 넓은 잎에 짙푸름 가득했지만 이제 누런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가을이 왔나 보다.
006 신호등
2019-10-08
바삐 길을 가던 중이었다 무한한 권능을 가진 신호등은 나를 불러 세웠다 하필 갈림길이었다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005 짜장
2019-10-01
점심시간 단골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온 짜장 한그릇 덕분에 밥 한그릇 뚝닥 비웠다 별것도 없다 감자며 양파며 고기조금 그리고 춘장과 갈분 맛있게 먹고나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시는 것 같다 "야 이눔아, 고집 그만 피우고 짜장만큼만 살아라."
004 산
2019-09-24
어둠 속에서 길을 떠났네 빛이 어둠을 삼키고는 하루의 시작을 알렸네 언제나 그랬듯 산은 그 자리에 있었네 저 산! 곧 단풍이 들겠지만 아직 안개 속이다.
003 저 너머에는......
2019-09-17
여름내내 대지를 달구었던 태양이 물러 나기가 싫은 것이다 저 너머 태양은 열이빠지고 빛만 남았다 열이 빠진만큼 꼭 그만큼 더 강렬하다 그늘에서 바라본 태양 아래는 열을 뺏긴 채 꼭 그만큼 강렬해진 빛이 있다.
002 안내문
2019-09-11
인생은 제품특성상 반품 및 교환, 환불이 안됩니다. 출생시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조물주
001 가을장마
2019-09-03
때늦은 가을장마에 아침부터 고즈넉하다 밤새내린 빗방울 바람에 휘날려 유리창에 붙었다 방울진 물방울로 풍경을 보니 흐릿하다 아직 다가오지 않아서 모를 내일 우리네 삶 같다.